조선어 한국어의 순수성을 논한다는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25-08-12 16:49|본문
한국어의 순수성을 논한다는 것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우리는 한국어 어휘를 분류할 때 대개 세 가지로 나눕니다.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가 그것입니다. 한자어도 외래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자어는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기에 외래어와는 분리하여 나눕니다. 한편 한자어가 우리말에서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한자어를 70% 이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주 쓰는 우리말을 보면 한자어의 비율은 훨씬 낮아집니다. 아무래도 한자는 개념어, 문명어 등에 더 많이 쓰이고, 그 고유어는 생활어에 많습니다.
우리가 기초어휘라고 말하는 어휘들은 순우리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한 언어의 골격을 이루는 말이기에 고유어이고 기초어휘라고 하는 겁니다. 기초어휘에 속하는 말로는 우선 자연어가 있습니다. 하늘, 땅, 해, 달, 별, 눈, 비, 바람 등의 어휘가 여기에 속합니다. 하지만 금방 눈치를 채셨겠지만, 산(山)이나 강(江)과 같은 말은 한자어입니다. 기초어휘에도 한자어, 외래어는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왜, 산과 강은 한자어를 쓰게 되었을까요? 원래 산은 ‘뫼’, 강은 ‘가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메아리, 두메 같은 말에 남았습니다. 산이나 강이 한자어로 바뀐 이유로 저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한자어로 지명이 바뀌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자연어가 산과 강이었을 겁니다. 지명에 산과 강이 쓰이면서 자연스레 독립적으로도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을 나타내는 말도 기초어휘입니다. 인칭어는 순우리말의 보물창고인 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언니, 오빠, 누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등 순우리말이 한가득입니다. 나, 너, 누, 남, 놈, 님 같은 말도 순우리말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눈치를 챘겠지만 형(兄)이나 동생(同生), 삼촌(三寸), 이모(姨母), 고모(姑母) 등은 한자어입니다. 이 중에서 형, 동생, 삼촌은 특이한 어휘입니다.
우선 형은 남자 간에 쓰는 말처럼 보이지만, 여성끼리도 형님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남편 형의 아내를 부를 때는 언니라고 하지 않고, 형님이라고 합니다. 동생은 더 특이합니다. 원래 동생은 같은 엄마가 낳은 형제, 자매입니다. 즉 위아래의 개념이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손아래의 형제, 자매, 남매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동생은 성별이 없습니다. 굳이 성을 나누려면, 여동생, 남동생처럼 구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동생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촌은 더 특이합니다. 촌수는 친척 간의 거리를 표시하는 말인데, 친족어로 굳어졌습니다. 촌수는 원래 ‘거리’를 분명하게 나타나는 말입니다. 1촌, 2촌은 부모와 자식, 형제 간을 의미하기에 촌수 자체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촌은 남자에게만 쓰는 어휘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여자는 고모, 이모라고 하지 삼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주도에서 여자에게 삼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어색하지만 재미있습니다. ‘형, 동생, 삼촌’ 등은 모두 한자어이지만, 한국어에서 의미가 변형된 한국어 어휘입니다.
우리말의 어휘는 순수한 고유어로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펴보면 기초어휘 속에도 한자어 등 외래어가 많습니다. 따라서 정말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지, 언어접촉의 관점에서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는 다른 언어와의 접촉을 통해서 변화해 갑니다. 때로는 아예 외래의 말로 바뀌기도 하고, 뜻이 변한 채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산과 강 그리고 형, 동생, 삼촌이 보여주는 어휘의 세상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언어의 순수성을 논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