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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기업가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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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19-06-02 06:48 조회 :66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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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기업가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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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에겐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 최대 재벌이라 불렸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인생을 통틀어 이 세 여인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고, 한평생 맴돌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고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매일 자정이 되어서 귀가하는  

정주영 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남편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이 일복(속칭 ‘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았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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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 대해 물어도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분이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 정회장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조강지처였다.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해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모든 돈을 쏟아 부었지만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정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단골손님이었던 정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 달라. 서울에 꼭 들러 달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정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났다. 정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 다녀오면서 오인보와 

함께 울었다.  

  

정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정회장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정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  

  

정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흙>을 보며 ‘허숭’처럼 경성에 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흙>과 

이장 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녀는 신랑을 소개해주면서 밥을 차려주었지만 정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 여자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식사 대접을 한 번 더 받고 준비한 선물을 준 뒤 헤어졌지만 그 후 오랜 세월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먼저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회장은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이회장은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가회동 2층에 침실을 마련했고, 그날부터 정회장은 

가회동에서 기거했다.  

  

정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2000년 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씨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정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 당국이 동원되어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다.   

  

북측은 정회장에게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난 그녀가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했다.  

  

그 후 정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몇 달 후인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 했고, 결국 그를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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