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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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6-15 09:37|본문
1. 지남침
이것은 방향을 지시하는 기기인데 자기학 원리에 의거하여 제조된 것으로 지질탐사, 항해 등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방향을 판단하는 기기가 매우 현대화되어 인류가 멀리 바다를 건너가거나 전지구를 두루 다니고 심지어 우주를 항해하는 것이 이미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 되었지만, 세계 최초의 방향 기기인 지남침은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대략 전국(戰國) 시기에 중국인들은 천연 자석을 갈아 끝부분이 둥근 작은 국자 모양으로 만들어 평평하면서 매끄러운 "지반" 위에 놓고 그것이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정지되었을 때에는 국자 자루가 언제나 남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최초에 발명된 지남침으로 고대 중국인들은 그것을 "사남(司南)"이라 칭했다.
"사남(司南)"의 탄생은 당시 중국인들이 이미 자석의 물리적 성능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중국인들은 나아가서 인공 자화(磁化) 방법을 발명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지남침과 방위 표기를 한 방위반을 함께 합쳐서 방향을 더욱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로부터 나침반이 탄생되었다.
약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중국의 지남침은 유럽으로 전래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중국 지남침의 기초 위에서 더욱 발전된 나침반을 개발하였다. 지남침과 나침반이 탄생된 이후에 지질 탐사와 항해 군사 생산 및 일상생활 등의 각 방면에 폭넓게 응용되었으며, 특히 세계 항해 사업의 발전을 매우 크게 촉진시켰다.
2. 화약
화약은 중국에서 1000여년 이전에 발명된 것이다. 일찍이 상주(商周) 시기에 중국인들은 야금 과정 속에서 목탄이 매우 쉽게 연소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단약(丹藥)의 제조과정 속에서 유황(硫黃)과 초석(硝石)이 폭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다시 목탄 유황 초석을 함께 혼합하면 점화된 후에 맹렬한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중국인들은 이상의 몇 가지 물질을 비율에 맞게 함께 혼합하여 그것의 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파악함으로써 화약을 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화약은 오래전부터 무기와 각종 폭발물에 응용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당말(唐末) 송초(宋初)에 중국인들은 화살에 화약을 붙여 화약화살(火藥箭)을 발명하여 살상력을 강화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화약 무기의 초기 형식이다. 북송(北宋) 말기에 중국인들은 화약을 이용하여 벽력포(霹靂暑) 진천뢰(震天雷) 등의 폭발성이 매우 강한 무기를 제조하여 전쟁 중에 거대한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이것은 무기발달사의 일대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화약은 중국인들에 의해 광산채굴 폭죽제작 및 기타 폭파 방면에까지 응용됨으로써 인류는 자연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과 화약 무기는 1225년 1248년에 인도를 거쳐 아랍(阿拉伯) 국가로 전래되었으며, 다시 계속하여 아랍 지역에서 유럽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14세기 중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약 무기를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화약의 이용과 화약 무기의 연구 제조 방면에서 중국보다 훨씬 더 앞서 나아갔다. 그렇지만 중국이 화약의 발명국으로써 인류의 과학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제지
인류가 종이를 발명하기 전에 문자는 단지 돌이나 금속에 새기거나 죽간(竹簡) 베 등에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매우 불편하고 문화 전달에 매우 큰 제한이 되었다. 종이의 출현으로 문자를 쓰고 보존하는 것은 매우 편리하게 되었고 문화의 전달 조건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세계 문명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제지기술도 중국에서 제일 먼저 발명되었다. 중국은 일찍이 서한(西漢) 시기에 이미 종이가 있었지만 그것은 질이 매우 조잡한 마지(麻紙)였다.
그 후 동한(東漢) 시기에 채륜(蔡倫)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제지술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 결과 만들어진 종이는 재료의 내원이 광범위하고 편리하며 경제적이어서 나무껍질, 삼, 헝겊 등이 모두 원료가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이의 질도 향상되고 대량 생산도 가능하게 되었다.
채륜의 제지술 발명은 중국 제지기술의 성숙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류에게 죽간이나 베 등에 글자를 쓰던 시대와 작별을 고하게 하였다. 후에 중국의 제지기술은 끊임없이 혁신되어 제지에 사용될 수 있는 재료도 더욱 광범위해지고 종이의 질도 더욱 좋아졌으며 종류와 수량도 더욱 많아졌다. 이와 동시에 송대(宋代) 소역간(蘇易簡)의 ≪지보(紙譜)≫와 원대(元代) 비저(費著)의 ≪촉전보(蜀箋譜)≫ 등과 같은 제지 경험과 기술을 총결한 서적도 출현하였다. 더욱이 명대(明代)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은 중국 제지기술에 대한 기록이 가장 상세하여 중국과 세계에서 고대 제지기술을 총결한 진귀한 문헌이 되었다.
중국의 제지기술은 7세기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고, 8세기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랍 국가로 전해졌으며, 12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계속해서 유럽 각 국으로 전해졌다가, 그 후에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해졌다. 중국 제지기술의 서방 전파는 유럽 문화의 발전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유럽의 문예부흥과 이후 세계의 문화·과학 사업의 번영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4. 인쇄술
인쇄술은 중국의 제지술에 뒤이어 문자의 전파 기술사상 또 하나의 중대한 발명으로 그 의의는 제지술의 발명을 능가한다. 제지술은 비록 문자의 수록 장소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책에 한 글자씩 손으로 베껴 적어야 했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느렸을 뿐만 아니라 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중국 인쇄술의 탄생은 마침내 이러한 중대 문제를 해결하게 됨으로써 인류 문화의 전파에 새로운 비약을 가져다주었다.
중국 인쇄술의 발명은 조판인쇄와 활자인쇄 두 단계를 거쳤다. 그 이전에 중국의 제지업과 인장 조각 공예의 발달은 이미 인쇄술의 발명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조판인쇄는 대체로 당대(唐代) 중기에 발명되었는데, 당시에는 주로 불경, 불상, 유가경전과 역법, 의약 서적 등에 사용되었다. 손으로 필사할 때에 비해서 그것의 효율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초기 조판인쇄는 여전히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즉 각 조판 위의 글자는 모두 함께 고정되어 있어서 글자를 분해하여 새롭게 배열하거나 조합할 수 없었으며, 일차적으로 인쇄한 내용을 바꿀 때마다 일차 판을 중각해야만 했기 때문에 결국 조판과 노력의 매우 큰 낭비를 가져왔다.
북송(北宋) 경력(慶曆) 연간에 필승(畢昇)이란 사람이 활자판 인쇄를 발명함으로써 마침내 인쇄기술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활자판 인쇄란 먼저 점토를 사용하여 하나하나의 한자인(漢字印)을 만들고 불로 구워서 단단하게 한 이후에 원고에 따라 자인(字印)을 자판 위에 배열하여 송진류의 물건으로 그것을 임시적으로 고정시키고 다시 판의 표면을 눌러서 평평하게 하는데 이렇게 하면 바로 인쇄할 수 있다. 인쇄가 끝난 뒤에는 자판을 분해하여 글자를 새롭게 배열하거나 조합하고 다른 내용을 다시 인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판에 글자를 하나하나 새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력과 비용도 절감되고 서적의 출판 속도도 향상되었다.
필승의 발명은 인쇄기술에 질적인 비약을 가져왔다. 그 이후 원대(元代)의 왕정(王楨)은 다시 필승의 점토활자를 나무활자로 개량하여 전반(轉盤) 활자법을 발명하였다.
명청(明淸) 시대에 중국은 보편적으로 주석 구리 납 등의 금속활자를 사용하였으며, 이로부터 인쇄기술은 다시 새롭게 향상되었다. 중국의 인쇄기술은 먼저 조선 일본 등 인접 국가에 전해으며, 그런 후에 다시 아랍과 유럽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