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의 양대 코드‘불 &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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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3-30 14:5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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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서 불을 쏘다 ▶ 삼국지 하이라이트 ‘적벽대전’
중국의 음식문화를 의식주 가운데 한 분야 정도로 대접한다면 그것은 패착이다. 식(食), 먹성이야말로 중국인의 오랜 사고 체계의 근저를 이루는, 필설로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중국 음식의 정상에 이른바 ‘국채(國菜·나라의 대표 요리)’라는 이름으로 군림하는 요리가 오리구이, 곧 ‘베이징 카오야)’다. 중국인은 대관절 왜 하고 많은 자신들의 요리 가운데 이 오리구이를 국채로 일컫는가.
화로에 장작불을 피워 겉으로 구워 익히는 것쯤은 누구나 어디서나 고기를 굽는 불의 사용법이다. 그런데 베이징 카오야는 좀 다르다. 오리를 잡아 내장을 비운 다음 배 속에 물을 채워 넣고 식도와 항문을 밀폐한 다음 장작불을 때면 겉은 파삭하게 익고 속으로는 물이 탕이 되면서 고기는 쫄깃하게 삶아지는 것이다. 이를 ‘와이카오 네이주’라 부른다. 겉은 굽고 속은 삶는다는 뜻이다. 물과 불의 갈마듦이 바로 ‘국채’의 비결이다.
중국인들이 베이징 카오야를 국채로 만드는 조리법을 개발하는 동안, 서방에서는 다른 불놀이에 몰두했다. 석탄으로 불을 때서 물을 끓여 피스톤을 움직이는 증기기관을 만들어 기차를 만들었고, 석유로는 내연기관을 만들어 자동차를 만들었으며, 수력과 화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전등을 켰고, 전신과 전화를 통하게 했다. 베이징 카오야를 문명의 대차대조표라는 저울에 달면 저울추는 서방의 계몽주의(enlightment)와 맞먹는 무게가 아닐까. 두 문명이 즐긴 서로 다른 불놀이는 이렇듯 근대의 운명을 가른 상징적 코드가 되지 않는가.
이쯤에서 올림픽 특수를 노리고 개봉한 삼국지의 압권 ‘적벽대전’을 물과 불로 접근해 보자. 비록 1탄에서는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2탄에서 필경 다루게 될 핵심은 주유와 제갈량이 손바닥에 적어 합의를 보는 ‘화(火)’, 곧 화공 작전, 그것일 테다. 적벽의 장강에서 벌어지는 수전에서 불의 공격을 구사하는 것. 거기에 천시가 개입한다. D데이는 동절기가 피크에 이르는 동지, 음의 기운이 정점에 이르는 그날을 임계점으로 해 양이 다시 고개를 든다. 바람의 향방도 바뀐다. 서북풍에서 동남풍으로. 동남풍에 실려진 것이 것이 바로 불화살이다. 그렇게 해서 적벽대전은 주유와 제갈량의 승리로 결판을 본다.
하지만 적벽대전이 전부는 아니다. 삼국지 끝판에 이르러 제갈량은 다시금 화공을 감행한다. 호로곡 전투에서 퍼붓는 불의 공격이다. 하지만 하늘은 제갈량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곧 비를 뿌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 구성은 그야말로 ‘구라’다. 역사서 『삼국지』를 소설 『삼국지연의』로 꾸민 나관중(羅貫中)의 오행 배치다. ‘관중’은 중국을 관통한다는 뜻이다. 중국을 관통하는 것이 ‘불’이 될 수는 없다고 나관중은 도리질을 친 것인가. 제갈량의 화공 실패라는 설정에는 바로 중국의 인문코드 가운데 오행(화수목금토) 특히 화·수, 곧 물과 불의 배치가 가로지른다. 중국은 불을 싫어해 근대에 못 미친 것이라 보자는 것이다.
지나친 과장이라고 욕을 한다면 『광인일기』의 작가 루쉰(魯迅)의 촌철살인의 필법, 아니 검법으로 물증을 보태면 된다. ‘중국인은 화약으로 폭죽을 만들었고, 나침반으로는 풍수를 보았다’. 풍수는 왜 보는가. 주로 묏자리를 보기 위해서다. 서방인은 그 나침반과 화약을 배에 올려 동방으로 내달아왔고, 그걸로 혼찌검이 난 사단이 아편전쟁이다. 화약과 나침반이 ‘메이드 인 차이나’였던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고, 넘겨줄 때 로열티 한 푼 안 받고 공짜로 넘겨준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다면? 자동차와 기차가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이 이미 낡은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면? 인터넷과 디지털이 그 교통수단을 대신해 정보를 전달하고 돈을 유통시키는 시절로 접어들고 있다면? 엔터키 한 번 누르는 것으로 몇 억 달러의 거액이 오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면?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2차산업으로 낙후된 업종이 되고, MGM을 위시한 영화의 매출액이 GM을 비롯한 자동차의 매출액을 따돌리는 시대라면?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의 매출액이 강철의 도시 시카고와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를 제친 지 이미 오래라면?
자본주의의 발전을 교통사의 관점으로 풀이한 페르낭 브로델은 스티븐슨이 발명한 최초의 증기기관의 크기가 물지게꾼의 지게에 실린 물통 크기였으며, 그 이름이 다름 아닌 ‘샘슨(삼손)’이었다고 적고 있다. 머리카락에서 힘이 솟구친다고 하는 서방의 천하장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했다.
이 대목에서 베이징 카오야의 생김새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보자. 긴 주둥이에 부풀어 오른 듯한 몸체가 어딘지 주전자 같기도 하다. 아마 그 착각은 제임스 와트가 찻물을 끓이기 위해 조개탄 난로 위에 올려놓은, 증기기관의 원리를 발견한 그 주전자에서 연상된 것일 게다. 와트의 주전자가 기계공업시대의 ‘한물간’ 낡은 주전자라면 혹시 베이징 카오야를 새 주전자로 빚어내는 것은 불가능한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대신할 마법의 주전자, 음양의 원리가 물과 불로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랑의 주전자로 빚어낸다면 요망한 상상력이 될쏜가. ‘미 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가 내게 다가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가 꽃이 되는’ 그 마법처럼, 누가 그 주전자의 이름을 지어다오. 샘슨처럼 무식한 그런 이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