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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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9-09-08 08:51본문
중국은 요즘 건국 60주년을 맞는 오는 10월1일 국경절 행사를 앞두고 경축행사가 열리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도심 새 단장이 한창이다. 광장 앞 창안다제(長安大街) 노면의재 포장, 광장 중심에 자리한 인민영웅기념비 세척은 지난 일요일까지 말끔하게 끝냈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올라 신중국성립을 선포한 톈안먼 성루 덧칠도 9월10일까지 모두 마무리하게된다. 창안다제 양쪽 쓰레기통을 바꾼지는 벌써 한참이나 됐다.
앞선 세대들의 삶과 열정이 녹아있는 옛 것을 가꾸고 지키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중국은 사회주의 정신으로 무장된 신중국 이후의 것들만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 베이징(北京) 시청(西城)구 바다오완(八道灣)후퉁(胡同·골목)을 들여다보면 이런 추측이 틀리지는 않을 것같다.
지난 주말 택시기사와 우편집배원조차도 모르는 길을 몇번씩이나물어보며 찾아간 바다오완후퉁 11호. 좁은 골목길을 50여m 따라들어가니 문짝조차 떨어져나간 대문이 나온다. 대문이라고 해야삼륜자전거 한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통로다. 골목과의 경계 역할에 지나지 않는 통로를 들어서니 또다른 골목이 나온다.
예전이 집에 있었다던 외원, 중원, 후원과 마당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벽돌로 칸을 질러 만든 단칸방들이 널찍한 사합원정원을 차지했다.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어디라도 벽돌로막아 방을 만드는 바람에 마당과 정원은 미로로 변했다. 사합원속으로 들어와 있는지, 달동네 골목길을 들어왔는지조차 헷갈렸다. 그럴듯한 사합원에 수십개의 방이 들어서 ‘벌집'으로 변해버린 이곳은 놀랍게도 루쉰(魯迅)의 옛집이라는 곳이었다.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이 살다 숨진 뒤 국가 소유로 되면서일반인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노부부에게 “도대체 몇 사람이나 사느냐”고 물으니 “50개 방에 1가구당 3~8명”이라며 몇 사람인지는 계산을 해보란다.
루쉰이 누구인가. “강국(强國)의 길은 정신개조에 있다”며 날품팔이 유랑인이자 건달에 가까운 ‘아Q'를 내세워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채 자기만족에 젖어있는 중국인들을 끝없이 힐책하면서 중국 국민성을 바꿔 보려던 위인이다.
바다오완후퉁 11호는 이런 루쉰에게 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19년 5·4운동이 시작되면서 고향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의상황까지 어렵게 되자 아내와 어머니를 베이징으로 불러 둘째 동생 내외, 막내동생과 함께 둥지를 튼 곳이 바로 이집이다. 1923년 7월까지 약 4년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풍파', ‘고향', ‘외침', ‘공을기', ‘작은 사건', ‘단오명절' 등에 대표작‘아Q정전'까지 자신의 걸작 가운데 절반 가량을 이곳에서 집필하고 탄생시킨 ‘중국 현대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다오완후퉁 11호의 현실은 ‘중국 현대문학의 산실, 루쉰의 옛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루쉰의 옛집'임을 알수 있는 어떤 표지판도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이 낡은 풍경마저도 조만간 이전하는 베이징35중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의 계몽운동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았을 신중국인?湧?건국 60년을 거치면서 어느새 G2라고 자부할 만큼 ‘강국'을 일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정신승리법'에만 빠져있던 자신들을 일깨운 정신적 스승의 집 한곳 정도는 ‘지마오쏸피(鷄毛蒜皮)'로 치부하고 있다. ‘닭털과 마늘껍질처럼 사소하고 보잘것 없음'을 뜻하는 지마오솬피는 신중국인들이 즐겨쓰는 성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