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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을 누빈 불멸의 항일운동가 조선족여성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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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20-09-2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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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독립운동가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유관순을 떠올린다. 

 유관순에 더해 임시정부의 어머니이자 <장강일기>의 주인공 정정화 여사를 거론하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 <암살>에서 총을 든 저격수 여성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분)이 연기한 남자현 여사를 언급하는 게 거의 전부일 정도이다. 

 

그만큼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억은 유독 인색하다. 독립운동이 남자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었을 텐데 우리의 기억 속에 여성독립운동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게 현실이다.

 더구나 항일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택했던 여성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실정이다. 조선의용대 항일여전사인 박차정이 해방 후 50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공훈이 추서된 것도 가족관계 내지 이념적 멍에와 관련이 깊다. 

  

그러면 같은 조선의용대 항일여전사인 이화림은 왜 아직도 망각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해방 7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까?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멍에 때문일 것이다. 이화림은 코뮤니스트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열정을 다 바쳤고 조선의용대 여성전사로서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살다가 죽었다. 

  

우리는 통상 항일전선의 순결한 영혼을 이야기할 때 무명의 조선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을 떠올린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김산의 치열한 삶과 순결한 영혼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로 그 김산과 동시대의 인물이자 동갑내기인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이화림이다. 본명은 이춘실이고 이동해는 상해 망명 후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당시 이름이다. 이화림은 이육사보다 한 살 어리고 윤봉길보다 세 살 많다. 

  

윤봉길의 상해 홍구 공원(현 루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은 만인이 기억한다. 역사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윤봉길의 투탄 사건 3개월 전에 발생한 거사가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왕 히로히토 암살 미수 사건이다. 이 사건이 성공했더라면 엄청난 역사적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다. 일왕을 향해 던진 수류탄이 빗나가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혀지고 기수와 경호원을 다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순간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트렸고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그것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을 겨눈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봉창 의사 역시 한국사 교과서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두 역사적 사건의 주역이 아닌 조역은 완전히 망각돼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바로 이화림은 두 역사적 사건의 결정적인 조역이었다. 그러나 교과서엔 단 한 줄도 기록돼 있지 않다. 기록은커녕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이화림은 존재하질 않는다. 

  
이화림은 1905년 평양 출신이다. 중국 광저우 중산대학 출신으로 중국공산당원이자 조선의용군 정치위원을 역임한 진광화(본명 김창화)와 동향이다. 둘은 중산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진광화가 자신보다 6살 손 위인 이화림에게 '누님, 아지매'라고 농을 걸 정도였다. 

 

진광화는 1942년 5월 일제의 태항산 소탕전에 맞선 반(反)소탕전에서 전사한 항일혁명가이다. 반(反)소탕전에서 함께 전사한 인물이 석정 윤세주이다. 그 둘의 무덤은 지금도 태항산에 나란히 묻혀 있다. 석정 윤세주는 항일혁명시인 이육사의 둘도 없는 절친이다. 육사의 시 <청포도>에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노래한 바로 그 사람이다. 석정 윤세주는 이화림을 조선민족혁명당(약칭 민혁당)에 가입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민혁당은 1930년대 무솔리니, 히틀러, 일본 군국주의 등 파시즘이 전 세계를 위협하던 시기에 결성된 항일단체이다. 윤세주는 민혁당 조직 확대 차 1935년 늦가을에 광저우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에 깊이 감명을 받은 이화림은 이듬해 1월 남경으로 직접 가서 민혁당에 가입한다. 민혁당은 김원봉의 의열단이 중심이 되어 1935년에 만든 항일단체로 이후 '조선의용대'의 근간이 된다. 

 

왜냐하면 민혁당(김원봉, 윤세주 등)이 중심이 돼 조선민족해방자동맹(김성숙, 박건웅 등)과 조선혁명자연맹(류자명, 유림 등)을 연합해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이라는 좌파 통일전선체를 결성한다. 그리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부대이자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군사조직이 '조선의용대'이기 때문이다. 

 

연변 동포사회에선 존경받았으나 남과 북에서 모두 버려진 인물 

   

 ▲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제1열에서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북한 초대 보건상 허정숙 (오른쪽 2번째 여성), 의열단장 김원봉(4번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리집중(5번째), 석정 윤세주(6번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7번째), 북한 초대 재정상 최창익(8번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이자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박효삼(11번째)의 얼굴이 보인다.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다.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보다 무려 2년 앞서 창건된 것이다. 바로 민혁당과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 그리고 조선의용대의 창설에는 정치이론가이자 탁월한 선전선동가인 석정 윤세주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윤세주는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로 이어지는 항일전선체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화림과 윤세주의 운명적 만남은 이화림이 조선의용대(군) 항일전사로 거듭나는 전기가 되었다. 나아가 이화림이 의과대학으로 진학해 의사가 되었던 것도 조선의용대(군)와 관련이 매우 깊다. 

 

그렇다면 이화림이 상해로 망명했을 때 백범 김구의 비서가 되어 신임이 두터웠는데 왜 둘은 다른 길을 걸었을까? 그보다 먼저 백범 김구 선생이 창단한 한인애국단의 핵심 3인방이 이화림, 이봉창, 윤봉길인데 그 둘의 거사를 가장 옆에서 도운 이화림을 우리는 왜 잊고 살았을까? 더구나 박차정처럼 조선의용대(군) 항일여전사로서 무장선전과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을 왜 망각의 늪에 빠트렸을까? 역사교사나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망각의 인물로 70년의 세월이 지나 버렸을까? 

 

그것은 이화림이 공산주의자이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목숨 바쳐 전 생애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뛰어난 인물 가운데 무명의 독립운동가 김산이 있었다. 같은 코뮤니스트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명의 김산보다 더욱 외면 받고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이 이화림이다.

 연변 조선족 동포사회에선 널리 알려지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에도 한국사회에선 그동안 철저히 외면 당하고 남과 북에서 모두 버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이 쓴 <이화림 회고록>이 2015년  한국에 번역 출간되면서 이후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7년 3·1혁명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그동안 망각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호명한 인물이 박차정, 동풍신, 윤희순이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에서도 항일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고자 기획행사를 추진하였다. 

 

그때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항일독립지사 김알렉산드라와 함께 중국에서 활약한 항일혁명가 이화림도 소개되었다. 이화림은 조선의용군으로 해방을 맞았고 중국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물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의사로서 그리고 공무원으로서 중국의료보건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화림의 치열한 삶의 흔적을 되짚어 보면서  한국역사의 소중한 한 부분을 되살려 복기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  중국에선 1994년에, 한국에선 2015년에 번역 출간된 <이화림 회고록>

ⓒ 차이나하우스 

 

상해 망명 후 이화림은 김두봉의 도움을 받으며 1931년 백범 김구가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자 이에 가입한다. 그리고 이름도 이동해로 바꾼다. 이화림은 사격과 무술 훈련을 받고 일제의 개가 되어 돌아온 밀정을 유인, 처단하는 데 앞장선다. 상해 체류할 때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백범 김구조차 동포들 집을 방문하며 식사를 해결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이화림은 조직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나물장사를 하고 수놓기와 삯빨래를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틈틈이 푼돈을 모아 독립운동 경비로 썼다. 그러던 중 1932년 1월 일왕 암살을 겨냥한 이봉창 의사의 투탄 사건이 있게 된다. 그 당시 수류탄은 중국군 고급장교로 복무하던 김홍일을 교섭해 김구가 확보했다. 문제는 수류탄을 어떻게 일본으로 반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백범일지>에 소상히 나오듯이 이봉창은 어린 나이에 일본인 상점에서 일을 한 탓에 어려서부터 일본어를 잘했다. 25살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일을 할 때 일본인의 양자로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따라서 일본어가 능숙했고 술에 취하면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곤 했다. 그래서 '일본 영감'이란 별칭을 얻었다. 

 

<백범일지>에서 의도적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은 이유 

 

처음엔 백범 김구가 의심했으나 이후 임정에 보고한 대로 상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장에서 월급 80원을 받고 노동일을 했다. 이봉창은 일왕 살해라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틈틈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돈을 모았다. 그리고 밥을 굶듯 하던 임시정부 청년들에게 술과 고기, 국수를 대접하며 친밀해졌다. 김구 또한 31살의 이봉창의 독립투쟁에 대한 기개에 크게 감복한다.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 재무부장 겸 민단장의 지위에 있었는데 임시정부 살림이 빈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백범 김구는 먼 길을 떠나는 이봉창 의사에게 300원이라는 거금을 건네준다. 이봉창은 다 해진 옷 속에서 거액을 꺼내주는 백범 김구 선생의 신임에 크게 감복하며 눈물을 흘린다. 

  폭탄 수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범 김구, 이봉창, 이화림 3인은 밤늦도록 고민한다. 수류탄 2개를 반입해야 하는데 가져갈 방도가 생각나질 않았던 것이다. 어느 순간 이봉창 의사가 휴대방안이 생각났다며 자신의 사타구니 밑을 가리켰다. 자신의 속옷에 넣어 가면 들킬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이화림은 너무 당황했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떨치고 이봉창의 팬티(훈도시)에 비밀주머니를 달아준 이가 이화림이었다. 

 

그렇게 일왕을 폭살시킬 수류탄을 몸속에 지닌 채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이봉창이 일제에 의해 처형 당했을 때 이화림은 오열했다. 그렇지만 <백범일지>에는 그 대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백범일지>에서 의도적으로 이화림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향하는 사상 및 독립운동노선 상의 차이에서 빚어진 서운함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화림은 개인적인 테러만으로 제국주의 일본을 구축할 수도 없고 독립을 이룰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애인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백범 김구가 가장 신임했던 비서인 이화림이 백범 김구 곁을 떠날 때 백범의 말은 단호했다. 

공산주의 사상을 좇아간다면 이젠 다시는 보지 않을 터이니 완전한 결별이었다. <백범일지>에는 이봉창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여러 장에 걸쳐 등장한다. 그러나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중심인물이었던 이화림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한 줄 기록조차 없다. 

  

이화림의 회고에 따르면 윤봉길은 이봉창과 달리 얼굴이 희멀쑥하고 둥그스름하게 생긴 편이었다. 이화림과 윤봉길은 부부로 위장한 채 거사 전날 홍구 공원을 답사했다. 실제로 윤봉길은 홍구 공원에서 봄부터 채소장사를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채소장사를 할 때 윤봉길은 일본 옷을 걸치고 게다짝을 끌고 다녔다. 그리고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기에 일본사람들조차 조선인인 줄 몰랐다.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일 김구는 생각을 바꾼다. 윤봉길은 일본어에 능숙했지만 이화림은 일본어를 잘 몰랐다. 부부로 위장하다가 오히려 검문에 걸려 둘 다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결연히 내놓은 애국청년을 두 사람씩이나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윤봉길은 스프링 코트 차림으로 이화림은 양장 정장 차림으로 홍구 공원에 함께 간다. 그리고 윤봉길 혼자 도시락폭탄(자결용)과 물병 폭탄(공격폭살용)을 휴대한 채 기념식장에 무사히 들어간다. 그 모습을 100m 떨어진 곳에서 이화림은 지켜보고 있었다. 윤봉길이 무사히 식장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이화림은 맞은 편 골목길로 사라졌다. 

  

윤봉길이 휴대하고 들고 간 것은 도시락과 물병, 그리고 일본 국기이다. 당시 상해 주재 일본 영사관은 일일신문(日日新聞)을 통해 전승기념식에 참석하는 일본거류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지했기 때문이다. 

  

"4월 29일 홍쿠 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 그날 식장에 참석하는 자는 물병 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을 가지고 입장하라." 

  

윤봉길 거사 후 김구의 독립운동 노선에 회의를 품은 이화림 

 

따라서 백범 김구는 일본인들이 어깨에 메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서 폭탄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김홍일의 주선으로 폭탄제조 기술자 중국인 왕배이슈는 5cm 두께의 철판도 박살낼 수 있는 위력적인 폭탄을 만든다. 거사 전에 백범 김구와 윤봉길 의사도 참관한 실험에서 폭발력은 놀라울 정도로 엄청났다. 상해 병공창 지하 토굴 실험 내부를 초토화시켰다. 

 

실제로 홍구 공원 천장절 기념식장은 윤봉길이 던진 물병 폭탄으로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해 일본인 거류민단장과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시켰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을 실명시켰고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츠 주중공사의 다리를 날려 버렸다. 

 

시게미츠는 종전 직후 4만 5천 톤이 넘는 미군 전함 미주리(Missouri)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자이다. 당시 그는 일본 제국 외무대신의 자격으로 왼손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바로 홍구 공원 윤봉길 거사 때 오른 쪽 다리를 잃은 탓이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거사가 성공하며 식장 단상이 박살나는 모습을 보자 이화림은 저절로 탄성을 질렀다. 그 거사 장면은 정말 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화림은 훗날 회고록에서 "마치 추풍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묘사했다. 윤 의사 거사 이후 이화림은 민족적 자긍심이 용솟음쳐 가슴 가득 충만했다. 길거리 중국인들은 반일감정 탓인지 만날 때마다 통쾌하다는 듯 엄지척으로 추켜세웠다. 

 

실제로 거사 직후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은 "중국인 2억 명과 중국 100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이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모두 윤봉길의 희생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거사 한 달 뒤 5월 25일 윤봉길 의사는 상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1월 18일 오사카로 압송된다. 그리고 사형 언도 한 달 뒤인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처형됐다. 눈을 가리고 십자가 형틀에 묶은 채 양미간을 겨냥한 총살형이었다. 윤 의사의 주검은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다. 

 

백범 김구는 해방 후 윤 의사의 유해를 수습해 효창공원 3의사 묘에 안장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윤 의사의 처형 소식에 이화림은 윤 의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오열했다. 

다음은 거사 며칠 전 윤 의사가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의 일부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하략)" 

  

윤 의사 거사 후 이화림은 김구의 독립운동 노선에 회의를 품는다. 개인의 희생에 의존한 테러로는 독립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직적인 대중 투쟁과 군사조직에 기초한 무장투쟁만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기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 

 

1920년대 의열단이 1930년대에 들어와 조직적으로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고 급기야 한인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건하는 것은 운동에 대한 성찰의 결과였다. 더구나 백범 김구는 사회주의 내지 코뮤니스트에 대해 매우 적대적 감정을 드러냈기에 이화림은 김구와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백범일지>에 이화림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사정을 배경으로 안고 있다. 

    

이화림은 의열단의 추천으로 혁명의 도시 광저우(광주) 중산대학에 입학한다. 중산대학은 중국 혁명의 대부인 쑨원(손문)이 혁명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대학이다. 처음엔 광동대학이라 했는데 쑨원의 호를 따서 중산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거기서 법학을 공부하다 의학으로 방향을 바꾼다. 아무래도 의학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할 때 신분을 감출 수 있는 적절한 직업이었다. 

 

중산대학에는 진광화, 이정호, 이동호, 노민 등 이미 조선인 학생 30명이 넘게 재학 중이었다. 중산대학 시절 이화림은 '용진학회'라는 항일결사조직에 가입하여 이론학습과 선전활동에 힘을 썼다. 

 

체구는 작았지만 용맹했고 작전이 시작되면 냉정했다 

  

이후 1935년 늦가을에 민혁당 조직 확대 사업 차 윤세주가 광주에 왔다. 평소 윤세주를 흠모했던 이화림은 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 이화림은 바로 남경 본부로 가서 민혁당에 가입했다. 과거 조선공산당의 상층 분열과 파벌에 실망했던 것과 달리 민혁당의 통일전선활동에 이화림은 열렬히 지지를 보냈다. 흩어진 민족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여 대일 전선을 통일시키려는 노력에 적극 찬동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피 끓는 조선 청년학도들의 염원이자 열망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임정 세력이 대두하기 전에 청년 대다수가 민혁당 광동지부에 가입함으로써 한 때나마 민혁당이 광동지역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이화림은 의학을 공부한 게 인정돼 민혁당에서 의료보건사업을 맡아 활동했다 동시에 조선인 여성들을 조직하고 중국여성들과의 연합전선 결성에 열정을 쏟았다. 

  

조선의용대에서 무장 선전활동을 전개한 이화림은 일본군 진지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 구호 선전과 삐라 살포 등 무장 선전에 항상 앞장섰다. 

실제로 이화림은 여자라기보다 남성다운 면모가 강렬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용맹했고 작전이 시작되면 냉정했다. 

조선의용군 출신 최후의 분대장이자 연변 작가였던 고 김학철옹은 젊은 날 이화림에 대한 인상을 부끄럽게 고백한 적이 있다. 

  

"이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몸에 군복을 입었더라도 여자는 여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결여된 까닭에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 못하는 것이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하고 경박한 편이어서 덩달아 이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이화림의 이런 모습은 항일독립전쟁에 목숨 바치기로 맹세한 상태에서 더구나 군사조직에서 자연스레 몸에 밴 자세였는지 모른다. 일부러 남자들에게 냉정하게 대했고 보통의 여자들처럼 언행을 일삼지 않았다. 이화림은 의열단 출신 조선의용대 총무조장 리집중(본명 이종희)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리집중은 의열단 출신으로 1922년 상해 황포탄 사건 당시 다나까 대장 암살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과 더불어 거사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김원봉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으로 해방 직전까지 김원봉과 활동을 같이 했다. 특히 1932년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고 김원봉이 남경 근처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군관을 양성하자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과 조선의용대 총무조장을 맡았다. 리집중은 코뮤니스트라기보다 김원봉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1939년 계림에서 만난 김학철옹의 회상에 따르면 이때 이미 남편과 사이가 멀어졌던 것으로 보아 이혼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화림은 1941년 7월 팔로군 사령부가 있는 화북지역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태항산에 있었는데 해발 고도 2000m가 넘는 고산들이 줄지어 있었다. 따라서 이화림은 열악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대원들을 이끌고 태항산 돌미나리를 캐어 미나리 김치를 담그곤 했다. 당시 이화림이 부녀대원들에게 들려준 '미나리 타령'은 '도라지 타령'에다 가사를 바꿔 부르면서 여성대원들의 흥을 북돋웠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에헤야 데헤야 좋구나/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식량이 부족할 땐 미나리 말린 것에 겨를 섞어 떡을 만들거나 도토리를 주워 묵을 쑤었다. 그래도 주식이 부족한 사정이라 민들레와 봄나물, 수양버들 잎사귀를 뜯어 항일 전사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1942년 3월 이화림은 중산대학 시절 가깝게 지낸 사이이자 같은 평양 출신인 진광화의 주선으로 간부훈련반에 들어가 무장선전활동 훈련을 받았다. 당시 진광화는 조선의용대 정치위원이었다. 

  

  이화림은 1945년 의과대학에서 수학할 때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의 명령에 따라 이화림은 의학공부를 마저 마친다. 그리고 1946년 11월 21일 이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이화림은 해방 공간에서 귀국하지 않고 연변의학원에서 근무하다 하얼빈에서 의사로서 인민에 봉사한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복무하는데 미군 폭격으로 부상을 입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이화림은 선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생국 부국장으로 의료보건사업에 남은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이후 명예를 회복한 이후 건강이 악화되자 노년기를 대련에서 요양하며 조선 민족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거금을 기부하곤 했다. 특히 조선족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특히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모은 돈으로 조선족 아동문학작가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했다. 1999년 2월 10일 임종 직전에도 자신의 전 재산 5만 원을 대련시 조선족학교에 전액 기부하였다. 이화림 여사가 운명했을 때 그 소식을 접한 시인 이윤옥은 이렇게 썼다. 

  

"이봉창, 윤봉길 도운 여장부 이화림...(중략) 태항산 거친 산림 속 마다치 않고/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절절히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그 이름 천추에 길이길이 남으리" 

  

한반도에 평화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과거 적대관계였던 미국과 북한 최고지도자가 서로 악수를 했다.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간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좌우 이념에 갇혀 편을 가르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옹졸하기 짝이 없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허다하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의 숭고함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 항일 독립운동의 공적을 사실 그대로 평가해도 대한민국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직도 반공이라는 냉전의 낡은 틀에 얽매여 선열들의 치열한 삶을 외면하는 것은 후손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했고 의사로서 인민에 봉사했으며 이승을 떠날 땐 자신의 전 재산을 동포학교에 기부한 이화림! 이젠 이념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그분의 고결한 삶에 찬사를 보낼 시점이다. 더더욱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선열들의 삶을 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조선족 이화림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도  서훈을 추서하는 게 좀 더 굴곡진 역사를 바로 잡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라 생각한다. 

오마이 허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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